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실(事實)과 허구(虛構) 사이에서 헷갈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을 뺨치는 허구가 있는가 하면 허구를 능가(凌駕)하는 사실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감상(鑑賞)하거나 소설을 읽을 때 실감난다거나 리얼(real)하다고 할 때가 그러한 경우이고 이산가족(離散家族) 생방송 같은 것을 보면서 아! 이럴 수가? 하면서 비통(悲痛)해 할 때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런데 요즘엔 인터넷(internet) 같은 새로운 매체(媒體)의 등장으로 사실과 허구의 구별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익명성(匿名性) 때문이고 둘은 의미조작(意味造作) 때문이다. 첫째는 실명(實名)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mass)이라는 그늘에 숨어서 무책임(無責任)하게 글을 올리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어떤 검증이나 확인절차 없이 퍼 나르는 글이 난무(亂舞)하기 때문이다. 의견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주장(主張)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떳떳하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고 하라는 것이다. 확인하고 검증한 후에 올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名譽)와 권위(權威)를 걸고 올리라는 것이다. 익명의 그늘에 숨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의미를 조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을 돌리고 감추지 말라는 것이다. 작명을 하고 베드 네이밍(bad naming)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고(誣告)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무고를 없애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일본에 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무고 때문이다. 제도에서 진 것이 아니라 운영에서 졌다. 운영의 묘에서 졌다. 우리는 신문고(申聞鼓)라는 제도가 있었고 일본은 직소(直訴)라는 제도가 있었다.
우리는 잘잘못을 가려 잘못한 사람을 벌주고 귀양(歸鄕) 보냈다. 세월이 바뀌면 반대파를 또 벌주고 귀양 보내고 해서 악순환(惡循環)이 거듭되었다. 일본은 소(訴)가 올라오면 잘잘못을 가려 소원수리해주고 소를 올린 사람이나 소를 당한 사람이나 모두 쳐버렸다. 그래서 무고가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을 내걸고 소를 제기해야 했기 때문에 무고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죽은 다음에야 송덕비(頌德碑)가 섰다. 여기서 우리가 진 것이다.
사실을 영어로는 팩트(facts)라 하고 허구를 픽션(fiction)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실과 허구는 어떻게 다른가? 사실은 기자들의 화두(話頭)이고 허구는 작가들의 화두이다. 소설이나 희곡(戱曲)을 쓰는 사람들의 화두이다. 기자의 생명은 사실을 추구(追究)하는데 있다. 사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보도(報道)한다는 것이다. 기자의 감정(感情)이나 생각을 가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비(是非)나 호오(好惡)를 가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옳고 그르다거나 좋고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의 감정이나 생각이 가미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비나 호오를 가리는 순간 저널리즘(journalism)의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小說)이나 희곡은 사실이 아니다. 꾸며내는 것이다. 기술(記述)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創作)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구라고 하는 것이다. 휙션이라고 하는 것이다. 휙션이란 넌픽션(nonfiction)의 반대개념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꾸며내는 이야기란 말이다. 사실이 아닌데도 우리가 소설이나 희곡 같은 문학작품(文學作品)을 찾고 영화 같은 것을 감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속에 진실(眞實)이라는 화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허구라는 형식(形式)을 빌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이나 희곡의 생명은 허구라는 형식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데 있는 것이다. 진실을 전달할 때 공감대(共感帶)가 형성되는 것이고 스스로 마음이 동해 감동(感動)하게 되는 것이다. 휙션을 말하더라도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떳떳하게 목숨이라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직(正直)과 진실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의미조작에 넘어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