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달력을 열자 삼일절이요 바로 경칩이 엊그제다. 늑대의 잇바디에 물렸던 겨울들판 잇몸이 부드럽다. 얼었던 혈관에 피가 흐르며 질식했던 들과 산이 드디어 호흡을 시작하고 있다. 꽃의 전령사가 산 비알 그늘 밑에 동장군을 일으켜 계급장을 뗀지 오래, 사후강직으로 빳빳하던 나뭇가지도 바람에 낭창거리는 여기도 봄이 왔다.
정월과 대보름, 입춘이 없는 2월은 생각할 수도 없다. 쥐불놀이로 겨울을 설거지하고 몸 뒤틀리는 권태와 우울에 불을 당겼지만 겨우내 삭신이 쑤시던 농부에게 있어 2월은 마지막 숨고르기 하는 달이다.
글은 놓은 지 오래 이고 황소만한 활자나 눈에 들어온다. 소싯적 한문께나 했다는 윤 영감만 포천신문 애독자다. 평생 지어온 농사일은 한 여름 땡볕은 힘이 들지만 어서어서 개구리 우는 모낼 철이 오면 좋겠다. 이제 수명이 높아 팔십이 가까워야 상노인이다. 육십은 청년이요 칠십은 한참 때다. 목침을 베고 이리 뒹글 저리 뒹글, 들여오는 상 받아먹기도 지루하니 오늘은 마을회관 앞이다. 남녘에선 꽃 소식이요 이곳은 아직 써늘하지만 정월이 지나고 부터 양지에는 고양이 세수할 만큼은 봄볕이 내린다.
‘청년’과‘한참’인 영감님들이 윷이나 한 판 벌이자고 이 구멍 저 구멍에서 슬슬 나오신다.
이 영감, 송 영감, 안 영감, 김 영감 기껏 모여야 네 사람이다. 폐렴으로 하나는 병원에 누워있고 하나는 은행에 가고 하나는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갔다. 둘씩 편을 짜고 났는데 말을 놓을 사람이 없다. 마침 마을버스가 마을 어귀로 들어온다. 오호! 잘 됐군.
“여보게, 문기사--윷 한 판 놀고 가!”
문 기사는 이 마을에 버스노선이 생기고부터 알아 온 사람이다. 집집의 대소사 깊은 속내를 마을 사람 뺨치게 아는 것이 마을 버스기사다. 손님이 없어 일찍 들어오는 날은 십여 분이나 기다려야 배차시간이다. 냇물을 차며 건너오는 소리에 문 기사가 창 밖으로 가래침을 뱉듯 대답을 한 마디 내지른다.
“어--알았어! 나 없으문 윷놀이도 못혀!”
다리를 건너온 문 기사한테로 젖이 늘어진 누렁이, 털이 뿌스스한 중개 못난이, 누렁이가 낳은 두 달쯤 된 강아지들이 조르르 몰려온다.
“아-이 놈들아, 너희들도 겨울 잘 났네!”
“-시간 읎서. 말이나 빨리 놔!”
“어 -던지기나 혀요-.”
윗마을에서 경운기 한 대 따따따따-은행나무 가로수를 한 대씩 쥐어박으며 내려온다. 경운기에는 묘에 갔던 사람, 산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잔뜩 탔다. 이들을 올려다보는 사이 못난이 중개가 윷 하나 물고 간다.
“야---이눔아! 이리 내지 못해!!”
이제 2월 무료의 창을 닫고 분주의 창을 여는 삼월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설레는 달이며 입학의 계절이다. 노루 한 마리 새벽 샘의 봉인을 뜯는 숲! 나의 내실에 불던 겨울 나그네의 옷자락도 아스라이 멀어질 때 앞 논바닥에 경운기가 섰다. 싣고 온 거름을 푸른 점퍼를 걸친 농부가 긴 발 쇠스랑으로 철퍼덕 철퍼덕 옮긴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신의 입김을 가장 먼저 읽어내는 이는 농부다. 거름을 다 옮긴 작은 산이 뻐끔뻐끔 담배를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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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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