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을 흔히 듣는다. 무언가 막다른 골목에 달했을 때 그런 말들을 한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이라는 것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니 마지막으로 부닥쳐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아니다. 이판사판이란 말은 원래 승가(僧家)에서 썼던 말이다. 절에서 썼던 말이다. 사찰(寺刹)에서 원리의 세계를 판단(判斷)하는 승려들을 이판(理判)이라 불렀고 현실세계의 일을 판단하는 승려들을 사판(事判)이라 불렀다. 이판의 정점(頂点)에 있는 스님이 방장스님이라면 사판의 정점에 있는 스님은 주지스님일 것이다. 방장스님은 불법(佛法)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을 한다. 학승(學僧)이나 선승(禪僧)이나 불문하고 방장스님의 휘하(麾下)에서 수행하고 배운다. 주지스님은 절의 살림을 맡는다. 스님들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주는 일을 한다. 방장스님이 불경(佛經)과 씨름을 한다면 주지스님은 불전(佛錢)과 씨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에선 이처럼 방장스님도 필요하고 주지스님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불법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다. 지혜는 깨우침과 통하는 것이고 자비는 베푸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깨우침을 주고 베푸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돈오돈수란 담박 깨닫고 담박 그 경지에 든다는 것이다. 담박 그 경지에 들지 못한다면 돈오돈수가 아니란 말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돈오점수란 차차 깨닫고 차차 그 경지에 든다는 것이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이처럼 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우선은 깨우쳐야 한다. 깨우침이 앞서야 한다. 무엇을 깨우치는가? 원리(原理)를 깨우치는 것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을 깨우치는 것이다. 원리는 하나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색이 실체(實體)라면 공은 원리(原理)이다. 태극(太極)이 실체라면 무극(無極)은 원리이다. 이처럼 깨우침은 하나다. 진리(眞理)도 하나다. 동양(東洋)이 어떻고 서양(西洋)이 어떻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실체(實體)는 하나다. 표현(表現)만 다를 뿐이다. 그들의 언어(言語)로 말하기 때문에 다를 뿐이다. 그들의 문자(文字)로 표현하기 때문에 달리 보이는 것뿐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이란 사실을 사무치게 깨우쳐야 한다. ‘태극이무극’이요 ‘무국이태극’이란 사실을 사무치게 깨우쳐야 한다. 그 속에서 윤회(輪廻)한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우쳐야 한다. 이 같은 깨우침에 전율(戰慄)해야 한다. 이 같은 깨우침에 함몰(陷沒)되어야 한다. 그 순간 우아일체(宇我一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와 나의 경계(境界)가 무너지는 것이고 너와 나의 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자연(自然)과 내가 하나가되는 것이다. 깨우침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정진(精進)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생을 바치는 것이다. 깨우침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베풀어야 한다. 행해야 한다.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행으로 그 경지(境地)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베푸는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적선(積善)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적선이라는 말은 주지스님과 잘 어울리는 말이다. 불법을 받들면서 현실을 쫓아야 하는 것이 주지스님의 소임(所任)이기 때문이다. 스님도 공양(供養)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초월(超越)해 불법만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도 지키고 불법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진여(眞如)를 다루는 이판보다 생멸(生滅)을 다루는 사판의 업보가 버거워 보이는 이유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다루는 사판의 일이 양도 훨씬 많고 배열이 복잡한 이유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아시아 불교계의 스테디쎌러(steady seller)였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판사판이 모두 필요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