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은 1754년(영조30년) 경기도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에서 경주이씨 부만(簿萬)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가문은 고려의 유명한 문신 익재 이제현의 후손으로 본래 문관 집안이었으나 후대에 문관으로 전환해 부친을 비롯하여 형제가 무과로 벼슬하고 있었다. 이벽 또한 키가 8척(2m40cm)의 거구로 한 손으로 무쇠 60kg을 드는 장수였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곱 살 때 4서3경을 읽어 외워 포천의 선비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일찍이 성호 이익이 이벽을 가리켜 장차 큰그릇이 될 인물이라고 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된 후 이미 타계한 이벽을 회상하면서 나에게는 비교가 안될 만큼 출중한 덕행과 해박한 지식이 있던 이벽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랴? 하여 이벽 님의 뛰어난 학문과 행실을 그리워했다.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이벽님의 6대조 이경상 때문이었다. 이경상은 병자호란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셨는데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귀국할 때 선교사 아담샬에게서 받은 천주교 서적중 일부가 이벽 가문에 전해왔다. 이벽님은 이런 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자연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청년 학자들이 1779년(정조3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사부격인 권철신을 주재자로 모시고 장학회를 열었다. 모인 학자들은 권일신, 이벽, 정약진, 정약용, 이승훈, 김원성, 권성학, 이총억 등 남인가의 자제들이었다. 이 천진암, 주어사 장학회가 ‘유교적 모임이냐? 천주교 모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천주교가 유교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청년학자들 모임이었다. 이 장학회에 이벽님이 참여하면서 서양지식과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점차 천주교라는 종교로 침잠하게 되었다. 1783년11월 이승훈은 이벽님의 주선으로 동지사로 가는 아버지를 수행 북경으로 간다. 이듬해 1784년 예수회 그타몽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요한 이벽은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등과 지식인 양반가 부녀자 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했다. 이벽은 아버지 이부만의 문중회의 출두 모욕과 문책을 당한데 대한 고민과 심지어는 아버지의 자살기도 등의 시련을 맞는다. 아버지에 의해 후원 별당에 감금당하고 부친은“이벽이 천주교를 믿다가 천벌을 받아 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알렸다. 일이 이에 이르자 방안에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철야기도와 묵상에 전념, 결국에는 단식 14일만에 1875년 음력 6월14일 탈진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벽 님은 그렇게 승천했다. 18세기 조선 단 한 명의 선교사도 들어오지 않은 조선 땅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겨나게 한 세계 종교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 기록된다. 광암 이벽은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서양학문을 지식인들에게 싹 틔우게 한 최초의 선각자였으며 포천 출신의 위대한 지식인이었고 진보적인 사고로 당시 조선의 성리학의 질서아래 모든 사회가 통제된 사회로부터 신문명의 지식의 문을 처음 열었던 위인이었던 것이다.(이벽 님에 대한 전화문의가 연일 쇄도하여 본란을 통해 문의에 답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