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를 따르면 매사가 여유로워지나 욕심을 따르면 위험이 뒤따른다’ 순리즉유(順理則裕) 종욕유위(從欲惟危)라는 말이 있다. 순리(順理)를 따르면 매사가 여유로워지나 욕심(欲心)을 따르면 위험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욕심을 버리고 순리에 따라 일을 처리해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순리란 무엇인가? 순리란 자연(自然)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이 차면 넘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일에 무리(無理)가 따르지 않는다. 바둑을 둘 때 훈수를 두는 처지에서 보면 바둑을 두는 당사자(當事者)에게는 보이지 않는 훌륭한 수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바둑을 두는 당사자는 이겨야겠다는 욕심(欲心)이 있지만 훈수를 두는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어 상황(狀況)을 훨씬 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現象)은 삶의 현장(現場)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욕심을 버리면 보이는 진실(眞實)이 욕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순리(順理)와 종욕(從欲)을 말하는 것이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말도 있다. 순천이란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理致)를 따르는 것이다. 순풍(順風)에 배를 띄우는 것이다. 순풍에 배를 띄워야 힘들이지 않고 배를 몰 수 있다. 반대로 역풍(逆風)에 배를 띄우면 풍랑(風浪)만 만나게 된다. 순풍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고 역풍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종욕을 따르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탐욕(貪慾)을 버려야 한다. 욕심이 앞을 가리면 있는 현실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욕심이 앞을 가리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그 욕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욕심이란 충족(充足)을 뛰어넘는 것이다. 만족(滿足)을 뛰어넘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고 탐하는 것이다. 필요(必要)한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인데 그 이상을 취하려 한다. 그 이상을 취하면 짐이 되고 업(業)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認識)하지 못한다. 짐이 되고 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필요 이상 취하면 업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자족(自足)할 줄 알아야 한다. 배가 부른데도 사냥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라는 말이 아니다. 일을 하지말고 남의 것을 탐하라는 말이 아니다. 무위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것이다. 도식이란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다. 남이 땀 흘려 거둔 곡식을 탐하는 것이다. 도식은 도선(盜善)과 같은 말이다. 도선을 하지말고 적선(積善)을 해야 한다. 선을 쌓아야 한다. 착한 일을 해야 한다. 말로만 하지말고 행(行)으로 해야 한다. 행으로 선(善)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적선이다. 말로만 하는 것은 위선(僞善)이지 적선이 아니다. 도선은 물론 위선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땀 흘려 일해야 한다. 그리고 넘치는 것을 조건(條件) 없이 베풀어야 한다. 조건을 달면 안 된다. 조건을 달면 그것은 이미 적선이 아니다. 조건을 달면 그것은 그 순간 거래(去來)로 전락한다. 조건을 단다는 것은 탐심(貪心)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고 종욕(從欲)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건을 달지 않고 베풀면 그대로 돌아온다. 선업(善業)이 되어 돌아온다. 질량불변(質量不變)이라 하지 않았는가? 질량불변의 법칙은 그래서 소중하다. 종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행동(行動)을 하거나 판단(判斷)을 할 때마다 그 기준(基準)이 진실인가 아니면 나의 욕망(慾望)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욕망이 작용하면 판단은 곧 흐려진다. 진실이 통해야 한다. 진실이 곧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진실은 순리와 통하는 것이고 자연의 이치와 합일(合一)되는 것이다. 이치에 따라 행동하면 마음이 평안하여 여유로운 상태가 되어 진실이 보이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면 진실이 보이지 않아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순리(順理)를 따르고 종욕(從欲)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