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오곡백과 풍성한 날에 여름내 흘린 땀을 씻고 만찬을 즐기라 추석을 만드시더니 추운 겨울이 끝날 때 쯤 또다시 원기 충전하여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라고 조상님 앞에 모두 모이는 설을 정하셨으니 참으로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설날 이틀 전부터 마음이 분주하다. 신랑과 함께 일을 하는지라 잠깐씩 틈을 내서 설에 먹을 음식재료 준비를 하고 바로 전날엔 하루 종일 전부치기와 만두 빚기로 손에 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 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 넘치고 드나드는 아이들의 손에는 전과 한과로 연신 배를 채운다. 혹시나 체할세라 할머니는 식혜를 떠서 손자에게 먹이시며 등을 쓰다듬는다. 오는 사람 푸짐하게 먹일 마음에 함지박 가득한 만두 속을 다 빚고서 녹두전과 생선전을 채반에 한가득 부쳐 놓고 나니 피곤하지만 뿌듯한 마음이 함지박에 가득하다. 명절은 아이들의 잔치 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모인 조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씨름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뛰어 놀다가 들어와서는 또 부침개를 들고 뛰어나간다. 명절에 할머니들이 해 주시는 음식은 이상하게도 구수하면서도 정겨운 것이 어느 인류 요리사라도 흉내 내지 못하는 연륜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별한날 고기 집에서 외식을 하는 것보다도 더 맛있는 웰빙 식단이 된다. 설날이 있기에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은 이 맛을 자식과 손자들에게 정성으로 보여주시니 힘든 사회생활 속에서 잃었던 입맛을 되찾고 인스턴트 음식에서 맛볼 수 없는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까치의 노래 소리와 함께 설날 아침이 밝았고 큰댁에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아침상을 물리니 세배꾼들이 몰려들고 어르신부터 시작된 세배는 어린 조카까지 순서를 기다리고 정겨운 세뱃돈이 나오자 어린 조카들은 싱글벙글, 가장 나이 어린 조카의 앙증맞은 세배모습에 모두가 미소를 뛴다. 서둘러 고속도로를 타고 친정집에 도착하니 엄마 아빠가 목이 길어지신 채 반기신다. 세배를 올리고 외손자의 세배를 받으시니 얼굴에 미소가 퍼지셨고 먼저 도착한 언니 형부 조카들의 얼굴을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생히 살아나면서 술과 함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본다. 그렇게 예쁘던 앞집새댁도 세월 속에 중년의 부인이 되어 놀러왔고 서울에서 크게 사업을 한다고 자랑거리였던 옆집 할머니의 큰아들도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소형차를 타고 내려온걸 보니 인간사 새옹지마라 부러워 질투하던 마음속에 측은지심과 동질감으로 세상을 안주삼아 함께 소주한잔을 나누기도 했다. 매년 명절이면 타보는 고속도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수많은 차량과 인파속에 나도 섞여있다. 뉴스에 귀를 기울이면서 길이 막히지 않는 시간을 찾아 고속도로를 달려본다. 네비게이션이란 것이 비서가 되어 볼거리도 제공하고 길 안내도 해주니 길이 막힌다 해도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앉아 있으려니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한복과 양장차림이 어울려서 가을단풍을 보는 듯 멋지다. 내년에는 나도 한복을 입고 멋진 모습을 뽐내는 인파속에서 허락된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집에 도착하여 보따리를 풀어보니 환갑이 넘으신 시어머님과 친정엄마의 반찬이 한자리에 모여 진수성찬이 되었다. 간장에 삭힌 무말랭이와 깻잎, 씨래기 나물, 그리고 만두와 떡과 전, 식혜와 수정과 등 한동안은 반찬걱정이 없다. 여자이기에 며느리이기에 해야 했고 엄마라서 할 수 있었던 음식준비가 먹고서 즐겁고 행복해하는 아이들과 가족 친지들의 마음속에 고향의 손맛으로 남겨진다면 온종일 기름 냄새 와 물일을 하는 것쯤은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으리라. 설이 있기에 느낄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누군가에게 줄 수 있었으니 조금 힘겹고 고단한 순간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설 명절은 고마운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고 가족 간에 서운했던 마음을 풀 수 있었고 조상님들 앞에서 내 부모 형제와 함께 내 존재의 근원을 찾고 내 아이에게 뿌리를 찾아주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느끼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기록해 두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