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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기 전 육군범죄수사단장. |
※편집자주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포천을 빛낸 인물 시리즈’는 학력, 경력, 포천발전 기여도 등에 상관없이 무순(無順)으로 게재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채문기 전 육군범죄수사단 총사령관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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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 33헌병대장으로 전입신고시. |
포천 출신으로는 최초의 육사 생도인 채준기 전 육군범죄수사단 총사령관. 94년 30여년간의 긴 군생활을 마친 채 사령관은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 더 가열찬 삶을 살아야 했다. 채 사령관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 교실이 없어 야외에 아무렇게나 있는 돌위에 걸터앉아 수업을 듣던 시절이었다. 당시 포천의 가장 큰 축제는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였다. 모든 종목의 대표선수로 뛰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운동신경을 지녔었다. 그때 먹던 국밥 맛이 꼭 고향같다고 말하는 채 사령관. 청성초등학교와 포천중학교를 졸업한 채 사령관은 현재 조남재 여사와의 슬하에 종혁, 예림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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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병학교에서 범죄수사과정 교육을 받을 때. |
■채문기 준장이 걸어온 길 포천 태생으로는 최초의 육사(정규… 4년제)출신으로 전 육군범죄수사단(미국에서는 C.I.D) 총사령관을 지낸 채문기 씨. 30여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지난 94년 4월 예비역 준장으로 전역한 채문기 총사령관은 포천시 군내면 직두리에서 1946년 10월 5일 태어났다. 채 사령관은 청성초등학교와 포천중을 거쳐 경동고를 졸업하고 1964년 14기로 육사에 입교했다. 포천출신으로는 최초의 육사 생도 탄생의 순간이었다. 이전에 강창성 국회의원이 4년제 편성이전에 8기로 육사생도가 되었지만 당시는 정규 육사가 아니었던 시절이다. 기수 통합과정을 거쳐 채 사령관은 육사 24기가 됐다. “항상 저에게는 처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심리적인 부담감도 많았습니다. 모든 길을 처음 걸어야 했기 때문에 방패막이가 없었습니다. 내 자신이 포천을 대표한다는 자세를 갖고 항상 남보다 더 노력하고 연구했습니다. 한번은 이한동 의원을 만났는데 그분도 검사 1호로서 저화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더군요. 그래서 대화가 잘 통했습니다.”라며 1호라는 자부심과 부담감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했다. 채 사령관은 실전경험을 한 마지막 육사 기수이기도 하다. 69년부터 월남전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더러 바로 밑에 25기나 26기 후배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주로 후방에 배치되거나 행정요원으로 활동을 했다. 채 사령관은 베트남전 당시 육군 소위로 맹호사단 기갑연대 부대원들을 이끌며 맹위를 떨쳐 귀국해서는 바로 중위로 진급하기도 했다. 이후 수방사를 거쳐 1981년부터 대통령 경호실 33헌병대 대장으로 85년까지 근무하게 된다. 채 사령관은 군생활의 대부분을 헌병대에서 보냈다. 포천에서도 약 4년여간 군생활을 했는데 80년부터 81년까지 8사단 헌병대장을 역임했고 85년부터 87년까지 5군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이후 수방사 헌병단장을 거쳐 3군 헌병대장, 육군범죄수사단 총사령관을 끝으로 화려한 군생활을 마친다. 채 사령관이 이처럼 헌병대에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은 물론이고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채 사령관은 76년 2월부터 약 8개월간 미국 헌병학교에서 범죄수사과정을 교육받았는데 이때 체득한 경험이 후에 헌병대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채 사령관은 30여년의 군 생활을 하면서 국가안전보장에 이바지한 공로로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고 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로 표창을 받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채 사령관은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포천을 빛낸 인물 시리즈와 연관이 깊다. 본지에 실린 인물들 중 권기하 포천 초대교육장이 외삼촌이고 박용구 박사는 둘도 없는 친구다. 이외에도 포천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지인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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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함께. |
■포천에 대한 추억 “공업화의 후유증이라고 하기엔 포천의 물이 심각하게 오염된 건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맑았습니다.” 포천에 대한 추억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역시 채 사령관도 물 맑고 인심 좋은 포천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다. “제가 어렸을 땐 학교건물이 없어서 야외에서 나무에 칠판을 걸어두고 돌 위에 걸터앉아 수업을 받곤 했습니다. 또한 매년 포천관내 전체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가 기억이 납니다. 가장 큰 축제이기도 했던 체육대회에서 대표선수로 뛰었던 기억과 그때 먹었던 국밥 맛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국밥 맛이 꼭 고향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천발전에 대한 제언 “먼저 내 고향 포천이 지난 10월 19일 시로 승격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포천시 승격을 위해 자신의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포천시민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올립니다.” 채 사령관은 포천시 승격에 누구보다 가슴 뿌듯함을 느끼는 이들이 외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운을 뗐다. “고향을 떠올리면 대한민국 어느 누구라도 모락모락 피어나는 초가집에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동구밖을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그만큼 발전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작정 개발지상주의에 치우쳐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근시안적 자세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개발과 보전의 조화를 지켜나갔으면 바랄게 없겠습니다. 고향에 내려가면 그렇지 못해 항상 아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위정자들을 탓하기에 앞서 내 자신부터 고쳐나갔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또 한가지 채 사령관은 포천의 폐쇄성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포천에 거주하지 않는다고 해서 포천사람이 아닌 게 아닙니다. 포천을 사랑하지 않아서 포천에 살지 않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포천의 ‘포’자만 들어도 한쪽 가슴이 뛸 정도로 포천을 사랑하는 외부인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경험과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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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 시절. | ■본지에 대한 당부사항 “지역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행정기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포천을 대표하는 언론으로서 앞으로 건강한 포천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포천신문이 지킴이가 되어 줬으면 합니다. 주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끊임없이 행정기관을 감시해 ‘진정한 통일조국의 중심지’ 포천을 만들어 나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가족관계 채 사령관은 그의 곁을 지켜온 조남재(52) 여사와의 사이에 종혁(25)씨와 예림(24)양을 두었다. 채 사령관은 평생 자신을 보필한 조남재 여사와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종혁씨, 서울대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준비중인 예림양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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