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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이해조를 위한 몇 가지 변명=3

의관은 의미없는 벼슬명칭을 붙이는 풍토에서 비롯
홍정선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9년 01월 30일


 홍정선(인하대교수, 문학과지성사 대표)


3. 이해조의 친일의혹에 대한 변명


이해조의 생애에서 우리가 친일로 단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활동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보기에 따라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다음에서 생애의 그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해조는 강제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에서 약 3년 정도 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은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한 후 언론과 출판에 대한 탄압을 개시했으며, 합방 후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가속화시켰습니다. 1919년 3.1운동 후 대정 데모크라시를 바탕으로 문화정치를 시행할 때까지 일본에 비판적인 어떤 언론과 출판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 탄압은 가혹했었습니다. 이런 시기를 맞아 당시 애국적 지식인들이 취하던 국외망명, 은둔, 자결 등의 행동을 이해조는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해조가 문필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대신 이해조는 현실과 타협하여 『매일신보』기자로 일하면서 열심히 작품을 썼습니다. 당시 함께 일한 선우일, 조중환, 민태원, 이상협, 윤백남, 백대진, 심우섭 등의 면면으로 보아 평소의 친분관계도 그의 선택에 상당한 몫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두고 당당한 일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친일파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 중 일본을 의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있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 생계의 차원에서, 혹은 발표지면의 확보를 위해 일한 것을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그렇게 일체의 행위를 친일로 단정한다면 우리는『매일신보』에 발표한 이광수의 『 무정』도 친일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단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일사학자인 강동진씨는 이해조가 관여한『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란 단체가 친일단체이며, 이해조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시전(詩傳)』이란 잡지가 친일 유생단체의 기관지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해조를 목표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제의 마수가 이미 이런 단체에까지 미칠 정도로 치밀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인데 여기에 이해조의 이름이 보이니까 사람들이 의심의 영역을 확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시기 이해조의 행적은 이런 단체의 뒤에서 일본이 어떻게 은밀하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는가와 관련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점차 보수적 유생으로 퇴행하는 과정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함으로써 국권회복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고, 사돈 집안인 김윤식이 연금되고, 부친이 작고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이해조는, 육당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점점 종전의 진보적인 시각을 상실하고 보수적인 유생의 시각으로 바뀌어 갔는데, 그의 이같은 변모가 유교단체에 가담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의관(議官) 벼슬에 대한 시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관이란 제도는 고종 32년 1985년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회의체를 폐지하고 중추원회의로 대체하면서 만든 직제의 명칭입니다. 여기에 정치, 법률, 이재 등에 밝은 사람들을 등용하여 일종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수십 명의 의관을 임용했지만 실제로는 의도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이해조는 1907년『제국신문』기자로 입사하고, 또 같은 해에 『대한협회』에 가담함으로써 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이해조가 관계한 이 기관과 단체의 구성원들이 입헌군주국을 지향하던 사람들이었던 만큼 국민대표적인 성격을 가진 "의관"에 대해 이해조도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관직자 명단 어디에서도 이해조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의관 벼슬을 했다면 그 기능이 거의 무력화된 시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염상섭의 소설『삼대』에 보면 양반으로 보이기 위해 "의관"이란 벼슬 이름을 적당히 사용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의관"이란 명칭은 당시 가장 쉽게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벼슬이 명칭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양반집안 사람이 죽었을 경우 "학생(學生)"으로 비명을 쓰는 것이 민망해서 의미 없는 벼슬 명칭을 붙이는 풍토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홍정선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9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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