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수 시인
요즘 장안에 난무하는 인터넷 악플과 세간을 떠도는 번지 불명의 루머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누가 누구를 위한 댓글이며 루머인가. 정말 안타까운 현장이다. 비겁하고 구역질난다. 어찌 이 꼴로 탈을 쓰는가 말이다.
도대체 물질의 체증인가, 가치관의 파산인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등뼈가 부러진다. 그래도 과거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 놓지 않았던가. 그냥 뱉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한 생명을 앗아갈 도끼라는 것에 소름이 돋아야 한다. 결국 독 품은 침이 후일 자신의 발등을 찍는다는 사실을 왜들 모를까. 사뭇 답답하다. 더구나 지성과 예술의 현장에서까지"하여가"의 독소들이 춤을 추는 것은 더욱 보기 사나운 일이다.
소위 문인이라 자칭하는 어떤 이들은 자신의 창작과 감상 수준의 수분(守分)을 모르고 거들먹이며 오만하다. 때론 발표 문예지의 사소한 실수를 들추어내어 흔들어 대고 인격사냥을 하기도 한다. 매사 사회적 인품이 우선이고 지성과 예술적 품격이 그 다음이다. 명예와 자존을 앞세우는 예술은 허사비다. 예술은 작고 사소한 일에 포용과 찬사를 보낼 때 그 꽃은 아름답고 인간의 품격은 고양되는 것이다. 남을 헐뜯고 모략하는 고약한 뜀박질은 이제 그만하자.
그렇다.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한낱 쓸데없거나 최고로 여기는 풍조가 화병이다. 그것은 성공과 영화라는 집착에서 파생된 좌절과 성취의 허무감이다. 이 또한 지상낙원에 대한 종교적 설교의 멀미현상이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켜 일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열망에서 오는 자본주의적 허탈감이라 해도 좋다.
이미 먹거리 문제는 진작 해결되었고 인간관계의 이반 내지는 문화적 욕구의 소통에서 빚어지는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에 의하여 도식화된 주관적인 불만과 변화에 대한 갈증이 폭발하는 화산작용이 아닌가도 싶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이상과 현실의 별리에서 떨어지는 무서운 상실감일 수도 있다. 이 또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확립되지 못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도덕적 오해가 마치 반 공동체적이라 몰아세우는 경우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의 건강한 완성이야말로 아름다운 사회의 초석이 됨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 스스로가 참된 자기 이익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함과, 변화해 달리는 21세기 문화의 열차에 즐겁게 동승해야 할 일이다.
생명의 존엄이 이래서는 안 된다. 생명을 너무나 함부로 다룬다. 자신의 목숨을 소유의 사고에서 발단시켜 매우 위험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고 있다. 생명은 결코 시장 원리적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자신의 수고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도 아니다. 분명 생명은 누구로부터 받은 고귀한 사용의 가치인 것이다.
모든 생명의 권리와 의무는 하늘과 땅과 인간과의 천부적 은사이며 약속의 이행과 화해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쩌면 세상에 소금만 너무 많아 세상이 짜고 쓰다. 단맛이 부족하다. 아니 맛을 내는 양념의 부재다. 자기변명과 세상을 성급히 바꾸려는 강박관념에 붙잡혀 있다. 우리는 소유에서 잃는 아픔보다 나눔의 미덕을 칭찬해야 한다. 너무 가득하면 넘치는 법이다. 이제는 황금만능의 우울증을 씻고 운동과 예술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넘치는 삶보다는 채우는 삶이 더 아름답다.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불편함보다 정신적 공허에서 오는 우울이 더 무섭다. 지금의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 우울을 해결할 수는 없다. 꿀이 달다고 해서 꿀만을 먹고살겠는가. 사랑은 꿀보다 달다고 했다. 꿀만을 먹으려 하기 이전에 사랑을 먼저 해야만 한다. 사랑의 묘약은 사랑이다. 미움의 묘약도 그 처방은 같다.
그러므로 예술의 미학을 탐구함이 그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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