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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생태도시의 조건1] “인간과 자연과의 만남에 대한 성찰과, 생태학적 사유의 가치”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04월 22일



공명수 교수(대진대학교 영문학과)

 

우리가 저마다 함께 살면서 호흡하고 있는 자연은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각별한 의미소로 작용하고 있다. 어렸을 때 기억 속에 남아있는 뒷동산의 장엄한 풍경이든,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욕망 속에 그저 생존을 위해 등질 수밖에 없었던 결핍된 고향이든, 배반의 아픈 기억이 묻어 있는 사악하고 황량한 황야든, 살충제의 남용으로 생명의 소리가 사라진 침묵의 들판이든, 자연은 우리의 자아의식을 구성하는데 핵심적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는 장엄한 대자연에 대한 국민적 자부심이 강하게 자리 잡 고 있다. 어느 누구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고향의 산천을 떠올리면 야성적인 즐거움과 귀소본능이 그 어디에서든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기에 자연이 우리의 일체의식의 뿌리임에 틀림없다. 이는 자연이 우리사회에서 국민적 정체성의 근간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 귀속감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의 만남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아형성과 문화적 에토스의 본질을 되새겨보는 필수적인 조건이자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자연이 단순히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체계가 투영된 이념태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연을 그저 우리의 생존을 위한 물리적 배경으로 도외시 해 온 근대적 인간중심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연을 개개인의 자아의식과 집단적 상상력의 원천이 숨쉬는 실존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환경주의자들이나 환경문학자들이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았기에 그것 속에 내포된 특별한 의미소를 간과하였다. 우리는 자연과 문화를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온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버리고 자연의 입장에서 자연이 우리의 필수적인 가치체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을 삶의 본원적 장소, 실존의 근원적 터전이라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생태주의나 생태문학자들의 주장처럼, 우리는 자연의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내재적 자세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문화적 가치가 깊이 매개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지리적 공간은 사회적, 문화적 에토스와 밀접한 상관성을 맺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이 사회적이고 심리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파악될 수 있기에 자연은 인간의 삶이 숨쉬고 있는 복합적인 관계망의 장소로 새롭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는 지리적 풍경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망이  뒤얽히는 언술의 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이 우리에게 근원적인 귀속감을 제공하고 우리의 일상 속에 일어나는 삶을 포용하는 생명으로서 생태적 환경(milieu)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의 공동체적 가치와 심성 형성의 중요한 변수임을 유념하면서 자연이 거대한 유기체임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의 범주 속에는 원시적 자연과 도시적 문화가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시골의 한적한 풍경과 대도시의 정원의 정돈된 풍경도 우리에게는 모두 자연인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어느 공간에 살고 있든 상호 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며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상호 보완적인 공간으로서의 실존적 장소이다. 사회생태학자 머리 북친(Murray Bookchin)의 주장처럼, 환경의 범주는 생명의 본성에 충실하고 역동적 삶을 포용하는 공간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공간은 그것이 어느 지리적 공간에 위치해 있든 자연의 범위에 속한다. 이는 인위적인 문화와 환경도 생명체의 존재에 저마다 기여할 때, 그 공간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물리적 환경에서 벗어나 자연계의 지리적 장소의 범주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우리가 갈색경관을 이루고 있는 도시환경, 다시 말해 오늘날 절대 다수의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자연환경도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구체적인 생태적 삶의 예지를 얻을 수 있는 실존적 장소로서의 역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화비평가인 콜로드니(Annette Kolondy)는 자연을 서로 다른 관습과 언어가 상호 침투하는 ‘문화 접촉의 장소’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자연이 다양성과 차이성이 상호 공존하고 생동하는 유동적인 공간으로 재구성된다는 의미이다. 특히, 미국의 개척지의 신화적 역할을 해부한 문화비평가 스미스(Henry Nash Smith)는 원시적 자연과 도시문명 사이의 조화가 강조된 ‘중간 풍경’(middle landscape) 속의 목가적 삶에 주목하고 있다. 스미스의 이 같은 인식 속에는 정원과 기계의 조화로운 풍경이 미국적 유토피아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우리의 공동체에 내포된 천혜의 지리적 공간에 대한 유토피아적 공간의 가능성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선전하는 거창한 구호 속의 그 어디에도 생태학적 예지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입장이 아닌 자연의 입장에서 자연의 섬세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의 가치를 우리의 삶의 공간으로 다시 환원하는 창조적 지혜가 없었다. 우리가 자연을 소유의 대상이나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 자연은 우리에게 무관심과 침묵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연의 진정한 친구가 될 때, 자연은 우리에게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가치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자연이 자본이 되는 논리가 여기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과의 접촉을 갖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자연과의 친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연계는, 인간의 성장과정이 그렇듯이, 탄생, 성장, 성숙, 사멸의 과정을 겪으며 변화해 간다. 가령 흔히 볼 수 있는 울창한 숲도 처음에는 자그마한 모종으로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큰 나무로, 이윽고 선구식물들이 자라는 잡목림으로 변화되고, 더 시간이 흐르면서 큰 나무들이 자라는 숲으로 발달되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생명체가 숨쉬고 있는 자연 속으로 우리 스스로 먼저 무욕의 자세에서 귀속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0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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