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의 삶과 다시 하나되는 소망을 표현해 백두천지에 띄운다. |
한반도를 지탱하는 설악산, 그 정상에서 우리의 춤가락이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상상을 한 번 해 보자.
손가락을 뻗어 건드리면 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파란 하늘과 흰 빛이 눈부신 설원을 배경으로 전통의 진수를 담은 우리춤이 시작된다.
돌고, 떨구고…. 가슴 속의 응어리를 표현해내는 하나하나의 몸짓이 그 어느 것보다 우아하다. 그 장면의 아우라가 가슴 깊이 새겨진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처럼 여겨지던 이 일을 현실로 옮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 김근희(57.사진.대진대학교 무용학과 교수)씨다.
88년 백설이 내려 앉은 설악산 정상에서 3회에 걸쳐 ‘영맥’을 주제로 산상(山上) 무용공연을 선보인 것.
“버스를 타고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자연을 무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게 오히려 우리 전통의 원형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원래 우리 선조들은 산에서 제사를 지낸 후에 춤을 췄잖아요.” 그는 “이렇게 옛날 식을 찾아가는 게 우리 한국무용가들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야외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현장 감각을 익히고 짜릿한 즉흥성도 맛보는 매력적인 공연이었다. 1990년에는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백두산에 올라가 ‘연맥’을 주제로 한바탕 춤판을 벌였다.
백두산에 올라 갈 때까지도 주변 사람들이 말렸던 그 때를 회고하며 “순전히 무대포 정신으로 이룬 것 같다”고 말하는 그. 하지만 “무용하는 사람이 무용하겠다는 데 이념이 다 무엇이고 사상이 다 뭐냐”고 아직까지 큰 소리다.
하긴 그가 말하는 “춤 출 때 온 몸의 잔 솜털까지 곤두서고 자그만 모공 하나 하나에서 진액이 분출되는 듯한” 그 기분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풍부한 부모님의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그는 “50여년 춤에만 매달려 있었지만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당당히 밝힌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새로운 춤이 그려지면 벌떡 일어나 새벽 2시까지든, 3시까지든 추었다. 그러다 잠들면 꿈 속에서까지 연습이 이어졌다. 24시간 춤과 함께 생활하며 몸은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족해져 갔다.
경기도립무용단장을 역임하면서도 남들이 다 힘들다고 말리는 무용극에 빠져 일 년에 두 작품씩 꼭 무대에 올렸다. 심청전, 흥부전 등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지루하지 않도록 스펙타클하게 연출하는 덕에 팬 층도 두터워졌다.
그녀의 현재 모습 뒤에는 철저한 ‘자기 절제’가 뒷받침되고 있다. 그는 “예술가적인 정신은 마냥 게으르고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한 길 가는 것을 왜 우러러 보겠어요. 그것을 제외하고 다른 곁가지들은 다 쳐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다른 것은 포기하고 집중해서 연습하고 고뇌하다보면 자신만의 철학과 개념이 절로 생기죠.”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추세지만 국내에서의 부흥은 여전히 과제다. 그는 여기에 대한 해법으로 “최승희나 김백봉, 리틀엔젤스 같은 스타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또 “예술은 공유해야 하는 것이고 공유하는 것이므로 순수예술의 범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객을 이끌고 가야 하는 예술의 본능을 무시한 채 관객은 저 멀리 있는데 혼자만 앞서가서는 안 된다는 것.
그에게는 앞으로 금강산에서 산상(山上) 공연을 가진 후 세계 명산을 찾아다니며 우리의 전통 춤을 알리겠다는 큰 포부가 있다. 또 광릉수목원에서의 낙엽을 배경으로 하는 야외공연도 꿈꾼다.
지난해 “내 작품은 내가 위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엿가락 춤’, ‘무궁화’ 등 자신이 창작한 무용에 대한 저작권을 신청해 지정받을 정도로 당찬 그다.
지금도 무용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동시에 무용계의 큰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런 일들을 해낸 그이기에, 그가 밝힌 포부이기에 머지않아 세계의 명산 위에서 펼쳐질 신명나는 우리 전통 춤의 향연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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