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봄 날씨 치곤 나른하리만치 따뜻한 오후였다. 나가 산책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명희는 그냥 머그잔 가득 커피를 타서 아파트 베란다 의자에 앉아 조용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강에 새로 생긴 넓은 다리 위로 쏜살 같이 달리는 자동차가 바람을 가르는 것 같아서 시야로 밀려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넘길 때면 밀물 같은 파도가 덮치는 것 같은 환상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화단 옆에 오년 전 감나무인줄 알고 심은 고염나무가 이젠 3층까지 키가 자라서 가을이면 새들의 천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은 가지의 고욤을 누구 하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새들은 마음 놓고 가을의 만찬을 즐겼는데 이젠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길목이라 그런지 전에 심심치 않게 듣던 새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았다.
풍경만큼 화려하지 않은 정적을 깨는 벨소리가 들릴 때까지 명희는 이 계절의 피크닉을 노란 개나리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여보세요"
"명희니 엄마야"
"왠일이세요? 이 시간에 전활 다 주시고"
"아버지가 암이란다."
순간 할말을 잃은 명희는 봄날의 풍경을 깨뜨리는 전화기를 들지 말걸 하고 후회 했었다.
원래대로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다시 그녀가 느끼던 그 고요속으로 빠져 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 번이고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었다.
병원에 가기로 하고 채비를 한다. 겉옷 단추를 꿰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택시에 올랐다.
조금 전 명희가 본 풍경 속으로 택시는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고 주변은 시끄러운 클락숀 소리와 검은 매연에 쌓이는 듯했다.
만원으로 채워진 버스가 옆을 지나 칠 때면 버스 안의 소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빠르게 토해지듯 내린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 각각이다.
집에선 구경도 못 할 만큼 커다란 TV를 바라보는 사람들.. 아픈 환자들, 그들을 간호하는 보호자들, 그리고 문병 온 방문객들..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바보상자가 사람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손에 들려진 리모콘에 의해 돌려진 채널, 뉴스에 나오는 내용은 한·미 FTA에 반대 시위하던 농민이 분신을 시도했다는 내용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발길을 따라 가다가 물어본 아버지 병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문을 열었다. 침상에 누워있던 아버지는 명희가 들어오는 것을 미쳐 보지 못했다.
갈갈하게 올라오는 목안의 가래를 뱉어내느라 힘을 쏟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잡은 휴지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명희는 다가가 안타까운 마음에 아버지의 등을 쓸어 내린다. 고비 사막처럼 말라서 먼지가 들썩이는 것처럼 아버지의 등을 쓸어 내릴 때마다 황사가 눈앞의 공기 속에 가득 찬 것 같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등은 이렇지 않았다. 명희는 문득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업힌 기억을 끄집어냈다.
명희가 시골을 벗어나 생활했던 것은 어렸을 때 삼년 정도 인 것 같다. 농사 아니면 할 일이 없으셨던 부모님은 서울 영등포 시장에서 노점 과일 장사를 하셨는데 명희가 일곱 살 되던 해 겨울, 주변 학교로 언니를 따라 놀러 가는 것도 지겨웠는지 부모님 노점 판에 같이 따라 간다고 졸라서 같이 나간 날은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신이 났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도 처음 알았고 명희가 좋아하는 귤이며 사과가 그렇게 많다는 것에 신이 났었다.
검정봉다리 가득 담아 가는 귤이 종이돈으로 바뀌어서 아버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게 명희가 갖고 싶은 빨간 구두로 바뀔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커다란 빨간 고무 다라가 바닥을 보일 때 쯤 눈꺼풀 위에 사과하나씩 달아 놓은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뒷정리를 할 테니 아버지 함께 먼저 들어 가라하신다.
과일이 조금 남은 다라 하나를 남겨 놓고 아버진 빈 고무 다라를 한 손에 또 한 손엔 내손을 잡으시고 버스를 타셨다.
버스는 아궁이 불 지핀 집보다 더 따듯했다. 난 바로 잠에 빠져들었고 버스가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잠이든 명희를 아버진 깨우지 않고 업어주셨다.
버스 밖 찬 바람이 얼굴 스칠 때 명희는 다시 눈이 떴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 따스함의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잠들어 있는 척했고 그렇게 집에 다다를 때 까지 아버지 한 손에 빨간 고무다라가 들려있었다.
그 해가 명희네 가족이 서울에서 마지막 겨울을 보낸 해였다.
기침소리에 정신이 든 명희는 아버지의 등을 한번 더 힘주어 쓸어 내린다. 쿨럭 하는 깊은 기침과 함께 아버지를 괴롭히던 누런 가래가 빠져나왔고 아버지 등에서 쏟아진 70평생 먼지 같은 황사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딸은 그제 서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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