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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남열] 강성숙 수녀님과 작은 액자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3년 11월 30일
 
김남열/ 경영학 박사, 사)한국통일교육협회 회장
 
강성숙(康成淑) 수녀님께서 소천하셨다는 비보를 뒤늦게 접하고 마음으로 얼마나 슬펏는지 모른다. 수녀님께서는 코로나가 끝날 즈음 지난해 2022년 8월 1일 은퇴 후 몸담고 계시던 경기도 분당 수지 성모요양원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홀로 조용히 눈을 감으시고 주님의 곁으로 가셨다. 코로나 끝나면 꼭 찿아 뵙겠다고 다짐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필자가 강성숙 수녀님을 처음 뵌 것은 1987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36년 전이다. 당시 수녀님께서는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輝園) 원장(1985~1994)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명휘원은 영친왕비 이방자(英親王妃 李方子) 여사께서 설립한 사회복지법 이다. 이방자 여사님은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 공의 부인이시다. (영친왕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의 셋째 아들이시다.) 법인의 명칭 명휘(明輝)는 영친왕의 아호에서 따 왔다.

이방자 여사님은 1920년 일본에서 영친왕과 정략결혼 하여 일본에 거주하시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여 창덕궁 안에 있는 낙선재(樂善齋)에 안착하셨다. 한국에 정착한 이방자 여사는 남편이신 영친왕의 뜻을 받들어 장애인과 빈민 돕기사업 등을 펼쳤다. 복지법인 명휘원도 그런 차원에서 1967년에 설립되어 이방자 여사께서 직접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 하신걸로 알고 있다. 필자가 명휘원을 알게 된 1987년 무렵 명휘원에는 농아와 소아마비 등 지체부자유 아이들 약 100여 명이 공동 숙식을 하며 수공예품 등을 만들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소원인 지체부자유 아이들을 위한 복지법인 운영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왜냐하면 왕실재산을 넘본 사기꾼(?)들이 이방자 여사에게 접근하여 회탕질을 쳐, 많은 경제적 손실을 끼쳤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 어두운 이방자 여사께서 이들의 꼬임에 빠져 왕실재산 일부를 날린 것은 그것 또한 숙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이방자 여사는 복지법인 명휘원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판단하여, 이 법인을 천주교에 위탁 운영하여 줄것을 요청하게 되었고, 천주교에서는 성모수녀회 소속 강성숙(로욜라) 수녀님을 책임자(원장)로 하여 수녀 5명을 파견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강성숙 수녀 원장님과 필자의 인연은 앞서 말 한데로 1987년 가을이다. 필자가 1987년 5월 중소기업중앙회의 지원을 받는 한국중소기업개발원의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여 개원식을 갖은 바 있는데, 이 개원식 행사에 사회 저명인사 초청자 중 강성숙 수녀님께서도 초청되어 참석하여 주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필자는 답방 차원에서 명휘원을 방문하였다. 당시 명휘원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리 산모퉁이 마루턱에 대지 약 1.000여 평과 허름한 건물 몇 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첫인상 모습은 마치 시골 자그마한 초등학교 같아 정겹게 보였다. 지금은 그곳이 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서서 당시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후 명휘원은 경기도 안산시로 이전하여 현재 활발히 운영되고 있으며, 지체 부자유학교 운영등 한국에서는 큰 복지법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여의도에 사무실이 있던 필자는 틈날 때마다 명휘원을 찾았다. 그곳에는 앞서 말한데로 천진난만한 지체부자유 아이들이 힘겹게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었다. 수녀님께서도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작품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모든 생활을 함께하셨다. 특히 식사 때는 손수 쟁반을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직접 밥과 반찬을 나누어 주는 등 자상함과 사랑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필자도 그곳에 가면 그냥 있을 수 없어 팔 걷어 부치고 목각용 물건들을 나르곤 했다.

그럼에도 수녀님의 명휘원 운영은 힘든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명휘원의 수입은 장애아들이 손수 만든 수공예품 판매수입과 일부 독지가들의 후원금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 수입으로는 1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의 숙식과 법인의 경상비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필자는 작은 힘이라도 보템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1987~1989까지 약 3년여 동안 명휘원의 후원자가 되어 꽤나 열심히 봉사했다. 아이들이 만든 수공예품의 판매 등을 알선소개 하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3년여 동안 재정적으로도 천여만원 이상을 후원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던 1989년 가을 필자가 다니던 회사가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사옥을 옮기게 되었으며 필자도 이직 등 신상에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어쩌면 수녀님을 자주 뵙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명휘원으로 수녀님을 뵈러 갔다. 필자의 명휘원 방문 때는 항상 그랬지만 당시 인기상품 농심라면과 해태과자 등을 승용차에 가득 싣고서였다. 이날도 명휘원에 도착해 보니 역시 수녀님께서는 교실을 돌며 아이들을 위해 이것저것 챙기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나를 보고 반갑게 손짓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같이 식사하자는 싸인이다. 물론 식당은 명휘원 내에 있는 자체식당이다. 우리는 평소 늘 그래왔던 터였다.

점심을 마치고 원장실로 올라와 차를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 필자는 회사가 사옥을 옮기게 되었고 신상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음을 알려드리며, 그래서 자주 뵙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들은 수녀님께서 한참 동안 매우 곤혹스런 표정으로 창밖을 보시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책상앞 정면 벽에 걸려있는 작은 액자를 떼어 필자에게 주셨다. 그러면서 “형제님께는 아무리 생각해도 보답할 것이 이것밖에는 없다”라고 하셨다. 얼떨결에 받은 것은 단일 외자 화(和)라고 쓴 작은 액자(사진)이다. 이 액자는 수녀님이 항상 책상 앞 정면벽에 걸어 놓으셨던 것이다.

이방자 여사께서는 평소 한국과 일본국민들의 민족적 갈등을 매우 안타갑게 생각하시던 터라 그 갈등 해소의 하나로 평소 생각하고 계시는 속마음을 글로 남겨 놓으셨다. 당신의 그 표현이 화(和) 이다. 이방자 여사께서 이글을 휘호로 쓰시고 액자에 담았다가 강성숙 수녀님께 직접 주셨다. 강성숙 수녀님께서는 이 액자를 사무실 정면에 당신이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시고 항상 이방자 여사님을 생각하고 계시던 터였다. 이제 이 액자를 수녀님께서 필자에게 주셨다. 필자는 강성숙 수녀로부터 받은 이 액자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이방자 여사와 수녀님을 항상 생각하며 지났다. 현재는 이 액자는 필자의 자택으로 가져와 거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고 있다.
ⓒ 포천신문

그후 필자는 명휘원을 다시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명휘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 하였으며, 수녀님께서도 명휘원을 떠나셨고 필자도 직장 사정상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수녀님의 근황만은 먼 듯 가까웁게 항상 여쭈던 터였다. 수녀님께서는 필자보다 10살 연상으로 마치 큰 누님 같은 마음의 애정이 있었고, 수녀님과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애아들을 함께 돌보던 애톳함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도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했던 것 같다.

2020년 1월경 코로나가 막 시작될 무렵 문득 수녀님이 걱정되어 수녀님이 계시는 용인의 수지요양원으로 연락을 취했다. 면회를 한번 가겠다고 했더니 요양원의 함 사무국장님이 “코로나 때문에 면회는 삼갔으면 좋겠다”며 정중히 방문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안부만 전해 주시겠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 우겨서라도 요양원으로 찾아 뵜어야 했다.

그후 2022년 10월경 코로나도 좀 숙어지고 일반인들의 모임등 왕래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도 끝 무렵쯤 이제는 요양원을 방문해도 괜찮겠다 싶어 전화했다. 요양원에 방문 하겠다는 전화였다. 그랬더니 청천벽력 걑은 답이 돌아왔다. 두어달 전 그러니까 이해 8월 1일 “수녀님 께서 돌아가셨다” 한다. 나는 비보를 듯고 너무 큰 충격에 쓰러질뻔했다. 더는 수녀님을 뵐 수 없다는 마음에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마음속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문득 수녀님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2000년 쯤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정부 때 남북교류 차원에서 각계각층의 지도자들 30여 명이 북한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종교지도자로 천주교에서 지학순 신부님과 강성숙 수녀님이 대표로 참가하셨다. 그때 평양 떠나시기 전 잠시 뵈었는데 고향에 다녀오신다고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으시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수녀님께서는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셔서 1950년 평양 제2 여고를 졸업하시고 1,4 후퇴 때 단신 월남하시어 평생 하느님의 충복자로 사역하시다 돌아가셨다. 이제 뒤늦게 비보를 접하고 수녀님을 다시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다. 원래 성품이 인자하시고 마음이 착하고 선하셨으며, 언제나 웃음과 사랑으로 불우한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보셨다. 평생 봉사와 좋은 일만 하셨으니 필경 주님 곁으로 잘 가셨으리라 믿는다. 고인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김남열/ 경영학 박사, 사)한국통일교육협회 회장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3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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