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에는 "본능(本能)"과 "본성(本性)"이라는 것이 함께 숨어 있다. 본능이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는 행동(行動)을 말하는 것이다. 본능은 "무의식적 발로(發露)"란 말이다. 누가 가르쳐주거나 자신이 생각해서 그리 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이나 생각 없이 자동적(自動的)으로 행하는 "행동"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젖을 찾는 것은 "본능"이다. 누가 가르쳐줘서 그리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생각해서 그리 하는 것도 아니다. 천성(天性)으로 그리 하는 것이고 무의식적으로 그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성은 그게 아니다. 본성은"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치(理致)를 생각하고 의(義)를 생각하고 당위성(當爲性)을 생각한다. 이웃을 생각하고 타인(他人)을 생각한다. 국가를 생각하고 사회(社會)를 생각한다. 본성은 이처럼"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생각하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본성은"의식적(意識的) 발로"이다. 그래서 양심(良心)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양심은 본성의"텃밭"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본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본능은"나" 지향주의(指向主義)이기 때문에 나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나의 이익만을 추구(追求)한다. 본능이 발동하면 의(義)는 생각지 않는다. 당위성도 생각지 않는다. 실적(實績) 위주이고 능력(能力) 위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동을 거는 것이 본성이다. 이성(理性)이다. 이성은 "홍익(弘益)" 지향주의이다. 나도 잘 살고 너도 잘 살고 모두가 잘 살자는 주의이다. 본성은 의를 생각한다.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 본성(本性)은 이성(理性)이기 때문이다. 철학용어에 "구성주의(constructionism)"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란 말이 있다. 구성주의나 해체주의나 모두 이성을 생각한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구성주의는 외향적(外向的)이다. 이성으로 세상을 구원(救援)하고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해체주의는 내향적(內向的)이다. 해체주의는 이성을 통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세상의 이치(理致)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다시 경제실용주의(經濟實用主義)와 도덕명분주의(道德名分主義)로 나뉜다. 경제실용주의란 인간의 이기적(利己的) 본능을 합리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도덕명분주의란 도덕의 확립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실용주의가 본능(本能)을 따르는 것이라면 도덕명분주의는 본성(本性)을 따르는 것이다. 도덕명분주의는 본능을 억압하려 한다. 반면 해체주의는 본성을 내 세운다. 본성중심으로 사유(思惟)하기 때문이다. 본능의 이익이 이기적(利己的)이고 배타적(排他的)인 것이라면 본성의 이익은 스스로를 분비(分泌)함으로써 기쁨을 나누는 이타적(利他的)인 것이다. 이를 불가에서 말하는 업(業)으로 풀면 부정적인 업장(業障)과 긍정적인 직업(職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결국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개성과 능력을 표출하고 그것이 성공으로 이뤄질 때 세상에 대한 보시(布施)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보수(保守)와 진보(進步)의 다툼이란 것도 결국 경제실용주의와 도덕명분주의의 다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라는"잣대"를 놓고 보면 본능과 본성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공존(共存)해야 하는 것이다. 본능만을 주장해서도 안 되고 본성만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물론"내"가 우선이다. 세상(世上)은"내"가 있음으로서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내"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내"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인간과 인간이 함께 어울릴 때 빛나는 것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일 때 빛나는 것이다. 이웃이 없고 사회가 없는데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