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시간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여름의 푸름이 한 겹씩 물러날 때마다 우리가 지나온 날들도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초가을 바람이 옷깃을 스치던 어느 날, 국립전북기계공고 배관과 1회 동창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얼굴들. 교정을 함께 누비던 소년들은 어느새 이마와 눈가에 칠순이라는 깊은 나이테를 새기고 있었다. 그날의 만남은 단순한 동창회가 아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새로운 길을 선택한 친구 김치재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친구는 오랜 세월 몸담았던 동인요양원 원장직을 내려놓았다. 2013년 봄부터 올여름까지, 꼬박 13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친구는 기억을 놓아가는 어르신들과 몸을 가누기 어려운 이들의 곁을 지켰다. 퇴임식에서 건네받은 상패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이 짧은 글 속에 새겨져 있었다. 낮은 곳에서 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겼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친구의 손을 떠올렸다.
“아픈 사람의 등을 받쳐주었을 손. 굳은 손을 감싸주었을 손. 말보다 먼저 내밀어졌을 손.” 사람을 돌보는 일은 결국 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친구가 쉼 대신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새로 문을 연 곳은 ‘동인안마원’이다.
사람의 지친 몸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일이다. 안마원의 이름에는 ‘천화동인(天火同人)’의 뜻을 담았다. 서로의 다름을 넘어 마음을 열고 함께한다는 뜻이다. 국가 공인 안마사로서 익힌 해부 생리학적 지식에 13년 동안 사람을 돌보며 쌓아온 시간이 더해졌다. 그러니 그의 손은 단순히 굳은 근육을 풀어주는 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삶의 무게를 조금 덜어주는 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설빙에서 음료를 나누며 친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한때는 작업복을 입고 같은 현장에서 땀을 흘리던 친구들이 이제는 인생의 후반부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달렸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손을 뻗었고,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내 손으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건넸는가 하는 것임을.
친목의 자리가 깊어지고 가을밤의 공기가 차분히 내려앉을 무렵, 나는 친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치재야. 남들 아픈 몸 풀어주느라 네 몸 상하지 않게 건강부터 잘 챙겨라. 네 건강이 먼저다.” 짧은 말이었지만 오래된 친구에게 건네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깊었다.
우리는 평생 손으로 살아간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세상에 나오고, 누군가의 손을 놓으며 삶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때로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손을 뻗고, 때로는 넘어지는 사람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내민다. 돌아보면 사람의 온기는 결국 손끝에서 전해지는 것이었다. 친구가 이제 내미는 손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지친 어깨를 어루만지고 굳어진 몸을 풀어주며, 말 한마디보다 따뜻한 손길 하나로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가볍게 해주는 손.
가을 들판의 햇살은 낮아질수록 깊어진다. 우리의 삶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젊은 날처럼 눈부시지는 않아도, 지나온 시간만큼 깊고 따뜻한 빛을 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의 삶이 저무는 날, 서로의 손을 바라보며 말할 수 있기를.
무엇을 움켜쥐고 살았는지는 희미해져도 누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는지는 끝내 기억할 수 있기를. 가을이 시작하는 길목에서 친구의 새로운 길을 조용히 응원한다. 그의 손끝에서 건너간 온기가 또 다른 손으로 이어져 세상의 어딘가에 작은 따뜻함으로 오래 남기를.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